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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정반대의 행복』 #내가담은문장

〈어쿠스틱 라이프〉 작가 난다의 육아 에세이.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깊고 무거운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절대로 엄마가 될 수 없는 남성이기에 
경험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만이 
겪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 

아주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느낀 바가 참 많았다. 

2018.11.01

아이가 지하철 바닥에 토를 하고 칭얼댈 때도, 식당에서 여러 개의 앞 접시와 어린이용 포크와 가위를 요구할 때도, 물을 쏟아 식당 휴지를 몇 통이나 쓰게 만들고 점원을 바쁘게 만들 때도 관대할까. 카페의 음악 소리에 들썩들썩 춤을 추거나 큰 소리로 울거나 웃을 때도 아이니까, 라고 이해해줄까.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나는 성인들의 매너를 지키기 어렵다. 아이는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이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물을 쏟는다. 나는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이를 기계처럼 꺼놓을 수도, 내가 기계처럼 아이를 완벽히 ‘관리’할 수도 없다. 조용히 식사를 마치는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열차에서 정신없이 아이를 돌보다 떨어드린 기저귀를 동석한 언니가 챙겨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어느 ‘맘충 목격담’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43쪽)

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엄마들’에 속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 구분 지으려 해도, 결정권은 내게 없다는 것을, 강자와 약자,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빠를 수 있는 사람과 느릴 수밖에 없는 사람, 항의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우리가 예의 바른 엄마와 아이인지 매 순간 평가받는 일이, ‘그런 엄마와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한데 묶여 입장 거부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시선들이, 요구사항이 많아 불편하다는 이유로 구석 자리로 치워지는 일이, 이 위계질서의 하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나는 아이들보다 무례하고 시끄러우며 점원에게 소리 지르는 아저씨들을 평생 목격해왔지만, ‘그런 아저씨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갈 수 없는 곳은 세상에 없다. (245쪽)

카페에서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하자 옆자리 아이 엄마는 민첩하게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성인들의 ‘조용히 즐길 권리’를 위해 아기와 엄마는 38도의 햇볕 아래 서 있다. 카페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고 이미 충분히 시끄럽건만. 이어폰 없이 야구 경기를 보는 등산객,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호탕하게 웃는 커플, 신발과 양말을 벗고 소파에 발을 올린 아저씨의 무심할 수 있는 권력이 나는 참으로 놀랍다. 이미 성숙한 어른인 그들의 민폐는 (좀 짜증은 나지만) 있을 법한 일로 이해되고 ‘인간’이라는 대범주 안에서 희석되지만, 미성숙한 아이들은 울음소리조차 배려받지 못하고 아이 엄마들은 ‘맘충’이라는 낙인으로 겁박당하며 부당할 정도로 완벽해지기를 요구받는 현실. (246쪽)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저서 『책으로 가는 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다고. 나 역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살아야 한다거나 비눗방울을 불며 어른들 옷에 날아가 묻지 않도록 주의받는 세상은 뭔가 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247쪽)